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용의 눈물 (문단 편집) === 철저한 시대 재현과 탄탄한 스토리 === [[파일:attachment/tearsofdragon.jpg|width=450]] 1~2회에 나오는 [[위화도 회군]]의 한 장면. 왼쪽부터 [[조민수(고려)|조민수]][* 2차 요동출정 당시 우군도통사는 [[이성계]]였고, 좌군도통사가 이 사람이었다. 이성계와 의기투합하여 쿠데타를 일으키지만 이 사람 또한 곧바로 이성계에 의해 숙청당한다. 사실 이성계의 정치적 역량을 만만히 보고 [[창왕]]을 옹립시키는 등 이성계에게 개겼으나 이성계의 심복인 대사헌 [[조준(조선)|조준]]의 탄핵으로 박살난다.], 이성계, [[이지란]](퉁두란).[* 본래 여진족인데, 젊은 시절 이성계의 의형제가 된 사람이다. 본 작품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며 오래 등장한다.] 의상뿐 아니라 역사적 재현에도 충실했기에 요즘 나오는 어지간한 사극보다도 시대적 재현이 훌륭하다. [[파일:external/image.munhwa.com/19970321240004011_b.jpg]] 잠저[* 潛邸. 국왕이나 그 일족이 궁궐에 들어가기 전에 살던 집.] 시절의 [[원경왕후]]. 위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저고리가 팔 끝까지 내려가 있다. 역시 조선 전기를 다뤘던 사극인 《[[뿌리깊은 나무(SBS)|뿌리깊은 나무]]》, 《[[공주의 남자]]》에서 조선 후기식 짧은 저고리를 입었던 것과 달리 확연히 비교된다. [[왕자의 난]]과 [[조사의의 난]]이 상당히 스펙터클하게 묘사되었다. 더군다나 의상면에서는 정말 [[여말선초]]의 복식을 완벽하게 재현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그 역사 반영성이 철저했다. 어찌나 충실하게 잘 되었는지, 이때 만든 의상 상당수가 드라마가 방영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고려]]시대 배경의 방송물에 계속 재활용된다. 또한 남자 복식의 경우 '요선[[철릭]]'이라는 상의와 하의를 주름으로 연결한 옷을 처음 선보였는데 이때 선보인 옷이 나중에 가서야 실물로 발견된 요선철릭과 그 형태가 아주 유사해 그 위엄을 보였다. 또한 창들도 여러 특이한 모양의 창과 장군들이 차고 다니는 장검 등도 대체로 역사적 사실 반영이 잘된 편.[* [[위화도 회군]] 장면을 찍을 때 [[이성계]]가 황금으로 도금된 경번갑을 입었는데, 이 옷은 무려 80kg이나 [[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391827240650301002|나갔다.]] 그래서 촬영이 끝난 후 [[김무생]]이 꽤나 고생을 했다.] 환도 패용의 경우 잘못된 게 많긴 하지만, 103화 초반부에서 이숙번과 이성계가 만나는 부분에서 이숙번의 환도 패용을 보면 어설프게나마 칼집을 끈으로 허리에 매어 제한적이나마 재현하고 있다. 다만 이방원이 입고 있는 갑옷이 금속으로 되어 있는것이 아니라 패딩에 쓰는 천 조각을 이어 갑옷 모양새를 낸 것이기 때문에 좀 모양새가 빠진다. 극에서 등장하는 건물들도 현재의 세트장 건물과는 확연히 차이가 날 정도로 스케일이 상당한데 사실 [[경복궁]] 등 '''실제 궁궐 건물'''에서 촬영한 것이다. 당시 경복궁은 [[경복궁 강녕전|강녕전]]과 [[경복궁 교태전|교태전]] 권역을 복원하는 작업이 막 끝난 뒤였는데 마침 드라마에서 한양 천도를 이야기하던 중이었던지라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조사의의 난]] 진압 이후 개경에서 한양으로 재천도를 하고 나서는 [[창덕궁]]이 주요 배경으로 나와야 고증에 맞지만 계속해서 [[경복궁]]만 등장하는게 옥의 티라면 옥의 티. 사실 [[태종 이방원|태종]]은 본인이 직접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장소이기도 해서 살아생전 [[경복궁]]을 좋아하지 않았다.[* 주로 경복궁이 가장 많이 나오긴 했지만, [[창경궁]]도 굉장히 많이 나왔다. [[창덕궁]]은 대한제국 황실이 거주하던 궁궐이라 배수구나 서양식 전등도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여말선초 시기를 재현하는 궁궐로서는 썩 어울리는 공간도 아니다.] 태종 치세에는 [[창덕궁]]이 왕실의 주요 궁궐로 활용되다 태종 사후 [[세종(조선)|세종]] 때부터 다시 [[경복궁]]이 법궁으로 재활용된다.이러한 점은 문화재 보호 논란 때문에 극 초반의 중요한 장면만 찍고 그 다음에는 세트장이나 화성 행궁 등으로 이동하는 2000년대 이후 사극들과는 다른 점[* 2000년대 사극 중 실제 궁궐에서 극의 대부분을 찍었던 사극은 SBS [[여인천하]], KBS [[명성황후(드라마)|명성황후]] 및 [[장희빈(KBS)|장희빈]] 정도다.] 특히나 이런 류의 사극이 [[쿠데타]]를 일으키려 하는 주인공의 행동을 상당수 미화하여 "구국의 결단"이라는 핑계를 대고 측근들에 의해 마지못해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반해[* 가령 여러 사극에서 [[수양대군]]이 무력사용을 망설이는 것을 측근들에 떠밀어 쿠데타를 일으키는 걸로 그리는데, 실제로는 주저하는 인간들 윽박질러가며 주도한 게 세조다.] 이 드라마에서의 [[위화도 회군]] 당시 [[이성계]]와 [[왕자의 난]] 당시 [[이방원]] 캐릭터는 별다른 미화 없이 자신의 야심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며 쿠데타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그려졌다는 것이 특징이다. [[왕자의 난]] 때 세자 [[이방석]]을 죽일 때만 해도 그래도 동생이었던지 잠깐 생각하다가 곧 병사에게 눈짓을 보내서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는 방석을 끌어내 죽인 장면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파일:attachment/lskjdj.jpg]] 위 사진은 [[이성계]] 역의 [[김무생]], 아래 사진은 [[정도전]] 역의 [[김흥기]]와 [[신덕왕후]] 역의 [[김영란(배우)|김영란]]이다. 또한 원작인 《세종대왕》[* 이 책도, 제목만 세종대왕이지 조선 초기 태정태세 시기가 다 들어있다. 그래도 이쪽은 세종 치세도 여러 권에 걸쳐 나오기 때문에 태종 원탑주연인 이 드라마와는 결이 다르다.]에서는 [[정도전]]이 완전 소인배로 묘사되어 있지만 드라마에서는 기록 고증 등을 통해 [[조선]] 왕조의 주춧돌을 닦다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떠나야 했던, 그의 진면목을 제대로 조명해 낸 것도 매우 호평을 받았다. 특히 죽음을 맞으며 마지막으로 읊는 시[* 자조시, 실제 [[정도전]]의 문집 《[[삼봉집]]》에 그의 남긴 마지막 시로 기록되어 있다.'''30년 고난 속에 이뤄온 사업이 송현방 술 한잔에 허사가 되었구나''' 사실 정도전의 죽음에 대한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태종보고 살려달라고 빌면서 죽었다고 전해지기는 하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태종 측의 기록이므로 정도전을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다분히 들어갔을 수 있다.]가 [[폭풍간지]]. [[실록]]에선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다 비참한 죽음을 맞았으나 [[이환경]]이 종영 후 스페셜 방송에서 "조선을 건국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우며 그만한 파란만장한 일생을 산 사람이 그렇게 비굴하게 죽었을 리 없다" 하면서 비장한 최후로 그렸다고 한다. 태조실록을 쓴 주체가 바로 이방원 세력임을 생각하면 '''사료의 교차검증'''의 올바른 사례.[* 실제로 태조실록에는 [[정도전]]의 비굴한 최후 일화 다음에는 정도전의 사뭇 비장한 최후 기사도 실려 있는데, 정도전의 아들 정담이 '[[태종(조선)|정안공]]에게 빌어야 한다' 고 한 것을 거부한 일화가 그것이다.] 또다른 교차검증으로는 태종 초기의 업적으로 잘 거론되는 [[신문고]] 설치에 대해서도 [[하륜]]과 [[조영무]]가 북을 시험삼아 쳐 보는 장면도 나오지만 내레이션으로 신문고 제도의 한계도 같이 설명하며 장단점을 같이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선악 구도에선 벗어난 입체적인 캐릭터 묘사는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의 사극과는 매우 이질적인 것이었다. 김재형 감독의 전작인 《[[한명회(드라마)|한명회]]》마저도 [[한명회]]를 상당한 [[먼치킨(클리셰)|먼치킨]]으로 그렸을 뿐더러 한명회와 [[수양대군]] 세력에 끝까지 반대한 [[사육신]]과 [[김종서(조선)|김종서]]를 폄훼한 점이 많았다. 《용의 눈물》의 후속작인 《[[왕과 비]]》도 이점에서 자유롭지 못해 수양대군을 턱없이 미화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하지만 《용의 눈물》에서는 정도전의 재조명은 물론이거니와 카리스마있고 엄격하여 아들에게 화살을 겨누지만 결국 세월 앞에 정을 끊지 못한 태조 이성계, 아버지를 쫓아내다시피하여 권력을 얻었지만 [[인과응보]]로 [[양녕대군|아들]]의 망나니짓에 속을 썩인 태종 이방원, 남편을 보위에 올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다가 외척 약화 정책으로 친정이 박살나서 기댈 곳이라고는 자식들밖에 없는 외로운 어머니 [[원경왕후]] 등 다양한 인간군상이 기록상의 모습에 인간적인 각색이 덧대여졌다. [[야사(역사)|야사]]에 나오는 소소한 일화들도 드라마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도 특기할 점. 야사에만 나오고 실록에 기록이 없는 [[함흥차사]]와 실록의 [[조사의의 난]]을 적절히 믹스해서 이야기를 풀어냈다. 이것이 실패한 뒤 돌아온 태조가 아버지를 맞이하러 나온 태종을 처음엔 활로, 다음 연회석상에서는 [[철퇴(무기)|철퇴]]로 차례로 죽이려고 했지만 무위로 돌아갔다는 일화도 생생하게 재구성하였다. [[무학대사]]가 태조에게 이른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는 일화도, 그리고 한양 천도 직전 [[태조(조선)|이성계]]의 꿈에 '''태조 [[태조(고려)|왕건]]'''이 나타나서 "네놈이 내 후손들을 죽였으니 너 역시 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일갈하는 장면도 나온다. 이들 역시 야사에 전하는 이야기다. 이렇듯 실록에 나와 있는 정사와 따로 민담으로 전해지던 야사, 그리고 [[여말선초]]의 여러 인간군상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캐릭터까지 고루고루 잘 버무려진 탄탄한 각본으로 크게 히트를 했다. 어떻게 보면 작가의 주관이나 지나친 역사왜곡이나 상상력을 개입시키지 않고 정사와 야사 모두를 거의 유일하게 제대로 아울렀던 '''진정한 사극(史劇)'''이었다. 이 사극이 다른 사극들과 차별화되는 점 중 하나는 근래 사극에서 조정 대신들이나 선비들이 모여서 정책논의 하지 않고 정치 암투나 모략을 꾸미는 장면으로 때우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은 대신들이 정치모략을 꾸미는 것도 나오지만 '''제대로 정사를 논하는 국무 회의를 하는 장면'''이 굉장히 자주 나오는 편이다. 누군가를 제거하기 위한 탄핵과정도 신하들이 모여 논의한 다음 정식으로 상소문을 올려서 처결하고 큼직큼직한 사건들이 터지는 와중에도 인사조정, 구휼이나 서적간행, 명나라 사신행 등 정치, 행정, 외교 분야 업무를 수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최후반부 태종의 양위와 세종의 장인 [[심온]]이 사사당하는 등 숨가쁜 정국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태종과 세종이 [[최윤덕]] 등 중신들을 불러모아 국방 문제를 논의하는 모습이 세밀하고 심도있게 그려진다. 신하들이 일은 안하고 자객과 모략으로 정치하는 요즘 사극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덕분에 과거 왕조의 일상업무에 대해 나름 참고할 만한 사극인 셈이었다. 물론 시대적 배경이 새로운 나라를 세운 후 제도를 정비하고 개혁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이런 묘사는 당연히 있어야 할 부분이거나 별거 아닌 부분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왕정 시대에는 국가라는 하나의 조직이 어떻게 돌아갔고, 그 행정 기구가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최소한의 개념도 안 잡혀 있는 요즘 사극들과는 달리 국정 운영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들이다. 《용의 눈물》 이후로 어전회의는 매우 심플해져서 왕이 결정을 내리면 신하들은 그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혹은 "통촉하여 주시옵서서" 일변도로 나가게 된다.[* 이환경 작가 본인조차도 이런 모습을 이후 사극에서는 제대로 살려내지 못한다. 당장 "[[태조 왕건]]"만 보더라도, 어전회의 장면은 신하들 중 수장인 시중이 "허허...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꼬..."라고 하면, 주요 인물들이 "그러게 말이외다", "이거야 원", "이런 일이 어찌...", "허허... 참..." 정도로 대강 때우는 일들이 다반사이며, 대부분의 사극은 신하들이 하라는 정치는 하지 않고 모략과 협잡에만 더 공을 들이는 식으로 나온다. 그나마 사료가 부족한 고려시대 이전은 이러는 것이 그래도 납득이 되지만, 누가 무슨 발언을 했는지 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에 상세히 남은 조선시대. 특히 조선 후기를 배경으로 한 사극은 용서가 안 된다.] 그리고 극중에서 유명한 인물이 죽으면 실록에서 누군가 죽었다는 소식과 함께 "그는 어디 사람으로 언제 과거에 급제했고 무슨 벼슬을 지냈으며 무슨 업적이 있었다. 어떤 점은 장점이었으나 어떠한 것이 흠이었다"란 식의 기록인 '졸기'처럼 그 사람의 일생을 주욱 설명해주는 내레이션까지 깔아준다. 이는 주연인 태조나 태종 부자는 물론이고 [[정도전]], [[권근]], 하륜, 조영무 등의 신하들도 마찬가지. 특히 마지막회의 마무리는 아예 태종 [[이방원]]의 훙기(薨記)[* 유교사회에서 천자의 죽음은 붕(崩), 제후의 죽음은 훙(薨), 대부의 죽음은 졸(卒), 선비의 죽음은 불록(不祿), 백성의 죽음은 사(死)로 표현했다. [[조선]]왕조는 어쨌건 제후국을 표방한 나라이므로 태종 [[이방원]]의 죽음은 훙(薨)이 맞다.]다. 마지막의 '''"태종이 한 일이 어찌 세종보다 가볍다 할 수 있겠는가"'''란 내레이션과 함께 태종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며 엔딩. 《용의 눈물》이 또한 이전의 다른 사극과 차별화되는 점은 진정한 정치사극이라는 점도 있고 주인공의 미화가 상대적으로 이전의 사극보다 덜한 점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고정된 주인공을 제대로 설정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는 점이다. 이전의 신봉승이 주로 쓴 1980년대 사극은 일단 주연은 하나이나 점차 [[페이크 주인공]]화되며 진 주인공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서 일종의 [[군상극]] 형태를 취하면서 극이 지루해지고 통일감이 없어진 경우가 빈번했다. 그러나 《용의 눈물》은 주인공인 이성계, 이방원 부자를 극의 축으로 삼으면서도 주변 인물들의 분량을 적절히 조합하면서 주인공과 엮이게 하는 등 새로운 형식을 도입하면서도 기존의 사극 방식을 절충하여 연출력 역시 스토리라인에 뒤지지 않았다. 이 사극이 또한 히트하게 된 데에는 현실에서의 데자뷔도 크게 한몫을 했다. 극중 [[태조(조선)|이성계]] 재위기간의 [[태종(조선)|이방원]]의 왕권주의와 [[정도전]]의 신권주의가 당시 대통령 선거의 화두였던 [[김종필]]의 내각제 이슈와 맞아떨어졌던 것. 다만 한국 사극답게 주인공 투구 벗기기는 여전했는데 [[제1차 왕자의 난]]에서 [[태종(조선)|이방원]] 혼자 투구를 벗고 출전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